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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작가님(@KiyikKiyik ) 소설 「홈, 어웨이」에 등장하는, 글을 쓰면 작가를 응원해주는 워드프로세서를 실제로 만들어봤습니다.
이름은 HWWP(homeground of writer word processor)입니다. 아래 주소에서 바로 사용하실 수 있어요..!
hwwp.kr
MALAFANGIN retweeted
-Qué hizo Lula por Brasil, eh?
-Sacó a 30 millones de la pobreza.
-Bueno, pero aparte de eso, qué hizo??
-Puso a Brasil como sexta potencia según PBI.
-Sí, pero fuera de eso, qué más?
-...
MALAFANGIN retweeted
종심 얕은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뭐....
서울이 장사정포 사거리 안에 있다는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그래서 수도 이전하려고 했더니 경국대전 들먹이며 서울이 수도인 건 관습헌법에 해당한다고 하고..... 결국 수많은 젊은이들 목숨을 방패삼아 방어할 수 밖에 없는 거지.
MALAFANGIN retweeted
그것은 유교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때문이지
읽어라
성경 불경 꾸란 다 필요없는
귀신도 쫓아내는
큰 가르침이다.
그 근본 사상은 仁이다
정치하는 자가 유교를 잘못 이용해서
그 뜻이 상한것이지
이미 서양보다 2000년앞서서
민주주의와 사회복지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순장풍습에서 비천한 백성과 노예도 구하시니 천하의 성인이시다
仁을 이해하면 내가 한국인인것과 너가 중국인인것은 의미가 없다.
한 나라의 성스러운 군자로서 위정자는
내나라의 백성도 사랑하고
남의 나라 백성도 사랑한다
그것이 공자님의 뜻이다.
大道之行也 天下爲公
選賢與能 講信修睦
故人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
使老有所終 壯有所用 幼有所長
矜寡孤獨廢疾者 皆有所養
男有分 女有歸
貨惡其棄於地也 不必藏於己
力惡其不出於身也 不必爲己
是故謀閉而不興
盜竊亂賊而不作
故外戶而不閉
是謂大同
MALAFANGIN retweeted
1. 일본이 한국에 대해 헛소리함
2. 대만애들이 그대로 퍼다가 나름
3. 중국으로 퍼지고, 동남아 화교들이 동남아로 전달함
Ex) 일본이 kpop은 국책이라고 거짓말하니까 다른나라 애들도 kpop이 한국 주요산업인줄 알고 자기들한테 감사하라고 하다가
kpop이 한국gdp의 0.1퍼밖에 안된다니 충격받음
MALAFANGIN retweeted
불편해하는데 말 받아주니 계속 밥 먹자 하고 감정적 여유 없다는데 내내 만나자하고 사람들이 왜 본인을 불편해하는지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은데 본인을 좀 한번 돌아보셨으면 좋겠음;; 나이먹고 저게 뭐하는거야 대체
MALAFANGIN retweeted
북중국 한인(漢人)들의 선비화(鮮卑化)를 증명하는 중국 정사 기록
4~6세기 중국 북방에서는 선비족 왕조의 지배와 민족 간 혼거가 장기화하면서 한인들이 선비족의 언어·풍속·이름·군사문화를 받아들이는 현상이 실제로 발생했습니다.
이는 현대 학자들의 추측만이 아닙니다. 『북제서(北齊書)』에는 한인 출신 통치자가 선비족과 같아졌다는 기록이 직접 등장하고, 『안씨가훈(顏氏家訓)』에는 한인 사대부가 출세를 위해 아들에게 선비어를 가르쳤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특히 다음 사료들이 핵심적입니다.
### 1\. 『북제서』 — 한인 고환(高歡)이 선비족과 같아졌다는 직접 기록
『北齊書』 권1 「神武帝紀上」 · 당나라 이백약(李百藥) 편찬
원문
> 齊高祖神武皇帝,姓高名歡,字賀六渾,渤海蓚人也。六世祖隱,晉玄菟太守。隱生慶,慶生泰,泰生湖,三世仕慕容氏。及慕容寶敗,國亂,湖率眾歸魏,為右將軍。湖生四子,第三子謐,仕魏,位至侍御史,坐法徙居懷朔鎮。神武既累世北邊,故習其俗,遂同鮮卑。
번역
“북제의 고조 신무황제는 성이 고씨이고 이름은 환이며, 자는 하륙혼으로 발해군 수현 사람이다. 6대조 고은은 진나라의 현도태수였다.
그 후손들은 3대에 걸쳐 모용씨를 섬겼다. 모용보가 패하고 나라가 혼란해지자 고호는 무리를 이끌고 북위에 귀순하여 우장군이 되었다.
고호의 셋째 아들 고밀은 북위에서 시어사를 지냈으나 법을 어겨 회삭진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고환은 여러 대에 걸쳐 북방 변경에서 살아왔으므로 그곳의 풍속을 익혔고, 마침내 선비족과 같아졌다.”
이것은 매우 직접적인 기록입니다.
고환의 집안은 사서에서 발해군 출신으로 기록된 한인 계통 가문이었지만, 여러 세대에 걸친 북방 생활을 통해 선비족의 풍속에 동화되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習其俗,遂同鮮卑」(그 풍속을 익혀 마침내 선비와 같아졌다)\*\*라는 표현은 한인의 선비화를 사서가 직접 서술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출처: [『北齊書』 권1 신무제기 원문](ctext.org/wiki.pl?chapter=19…)
### 2\. 『안씨가훈』 — 한인 사대부가 자식에게 선비어를 가르쳐 출세시키다
『顏氏家訓』 「教子篇」 · 안지추(顏之推), 6세기 후반
원문
> 齊朝有一士大夫,嘗謂吾曰:「我有一兒,年已十七,頗曉書疏,教其鮮卑語及彈琵琶,稍欲通解。以此伏事公卿,無不寵愛,亦要事也。」吾時俛而不答。異哉,此人之教子也!若由此業,自致卿相,亦不願汝曹為之。
번역
“북제에 한 사대부가 있었는데, 일찍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열일곱 살 된 아들이 있는데, 글과 문서 작성에 제법 능숙하오. 그에게 선비어와 비파 연주를 가르쳐 어느 정도 익히게 하고 있소.
이러한 재주로 고관대작들을 섬기면 총애받지 않을 사람이 없으니, 이것 역시 중요한 일이지요.'
나는 그때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참으로 기이한 자녀교육이다! 이런 방법으로 재상에 오를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내 자식들이 그렇게 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 기록은 북제의 사회에서 선비어와 관련 문화에 능숙한 것이 관료 사회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록자 안지추 자신도 한인 사대부였으며, 그러한 풍조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직접 이 사례를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즉, 선비화는 단지 지배민족의 풍속만이 아니라 한인 지식인 가정의 자녀교육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출처: [『顏氏家訓』 교자편 원문](zh.wikisource.org/zh-hans/顏氏家訓_\(四庫全書本\)/卷上)
### 3\. 『구당서』 — 북조의 복식에는 북방 민족의 옷이 혼합되었다
『舊唐書』 권45 「輿服志」 · 10세기 편찬
원문
> 讌服,蓋古之褻服也,今亦謂之常服。江南則以巾褐裙襦,北朝則雜以戎夷之制。爰至北齊,有長帽短靴,合袴襖子,朱紫玄黃,各任所好。雖謁見君上,出入省寺,若非元正大會,一切通用。
번역
“연복은 옛날의 일상복으로, 지금도 상복이라고 부른다.
강남에서는 두건과 갈옷, 치마와 유(襦)를 입었지만, 북조에서는 융적과 이민족의 복식 제도가 뒤섞였다.
북제에 이르러 긴 모자와 짧은 장화, 합고(合袴)와 오자(襖子)가 있었으며, 붉은색·자주색·검은색·노란색 등 각자 원하는 것을 입었다.
군주를 알현하거나 관청에 출입할 때에도 정월 초하루의 큰 조회가 아니면 모두 이러한 복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는 중국 정사가 남북조의 복식 차이를 설명하면서 북조의 일상복에 이민족 복식이 혼합되었다고 명시한 기록입니다.
특히 북제에서는 해당 복식이 일상생활에만 그치지 않고 관청 출입에도 사용되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다만 여기서의 융이(戎夷)는 선비족 하나만을 가리키지 않고 여러 북방계 민족을 포괄하는 용어입니다.
출처: [『舊唐書』 권45 輿服志 원문](skqs.dazhishi.com/show_mqdgw…)
### 4\. 『위서』 — 선비족의 협령소수(夾領小袖) 여성복이 낙양에서도 남아 있었다
『魏書』 권21상 「獻文六王列傳·咸陽王禧」 · 북제 위수(魏收) 편찬
앞서 조사하던 \*\*夾領(협령)\*\*과도 직접 연결되는 기록입니다.
원문
> 高祖曰:「今欲斷諸北語,一從正音。……若仍舊俗,恐數世之後,伊洛之下復成被髮之人。」又引見王公卿士,責留京之官曰:「昨望見婦女之服,仍為夾領小袖。我徂東山,雖不三年,既離寒暑,卿等何為而違前詔?」
번역
북위 효문제가 말했다.
“이제 북방의 언어를 끊고 모두 바른 발음을 따르게 하려 한다. 옛 풍속을 그대로 따른다면 몇 세대 후에는 이수와 낙수 지역에서도 다시 머리를 풀어헤친 사람들이 생겨날까 두렵다.”
그리고 왕공과 경대부들을 불러 수도에 남아 있던 관리들을 꾸짖었다.
“어제 보니 부녀자들의 복장이 아직도 협령에 좁은 소매를 갖춘 형태였다. 내가 동쪽으로 떠난 지 3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사이 계절까지 바뀌었건만 너희들은 어찌하여 이전의 조서를 어기고 있는가?”
이 대목에는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효문제는 북방의 옛 풍속을 개혁하려 했으며, 그러한 개혁에 저항하거나 따르지 않는 복식의 사례로 \*\*夾領小袖(협령소수)\*\*를 직접 거론했습니다.
이는 5세기 말 북위의 수도 낙양에서 북방계 여성복이 실제로 착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문헌적 증거입니다.
다만 기록은 그 여성들의 혈통을 구별하지 않으므로, 협령소수를 입은 사람들이 모두 한인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출처: [『魏書』 咸陽王禧傳 원문](zh.wikisource.org/zh-hans/魏書/卷21上)
### 5\. 『주서』 — 한인 장군과 휘하 군인에게 선비식 성씨를 부여하다
『周書』 권2 「文帝紀下」 · 서위 공제 원년(554년) 기사
원문
> 魏氏之初,統國三十六,大姓九十九,後多絕滅。至是,以諸將功高者為三十六國後,次功者為九十九姓後,所統軍人,亦改從其姓。
번역
“북위 초기에는 36개의 나라와 99개의 큰 성씨가 있었으나 후대에는 그중 많은 것이 끊어졌다.
이에 공로가 큰 장군들을 36국의 후예로 삼고, 그다음 공로가 있는 자들은 99대성의 후예로 삼았으며, 그들이 통솔하는 군인들 역시 장군의 성씨를 따르게 했다.”
이것은 서위의 실권자 우문태가 군사조직을 선비족의 옛 부족 체계에 연결한 정책입니다.
대표적인 개성(改姓)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 한인계 장군·가문 | 부여받은 북방계 성씨 |
| ------------------ | ----------- |
| 양충(楊忠) — 수 문제의 아버지 | 보륙여씨(普六茹氏) |
| 이호(李虎) — 당 고조의 조부 | 대야씨(大野氏) |
| 이필(李弼) | 도하씨(徒何氏) |
| 조귀(趙貴) | 을불씨(乙弗氏) |
주의할 것은 이 조치가 일률적인 혈통상의 선비화가 아니라, 군사적 결속을 위해 성씨와 부족적 계보를 재편한 정책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한인계 장군 및 휘하 병사들에게 북방계 성씨를 사용하게 하는 선비화 정책이 시행되었다는 사실은 명확합니다.
출처: [『周書』 文帝紀下 원문](ctext.org/wiki.pl?chapter=85…) . 성씨 사례는 진인각(陳寅恪)의 [「統治階級之氏族及其升降」](zh.wikisource.org/wiki/統治階級之氏族及其升降)에서도 분석됩니다.
### 6\. 『북제서』 — 군대에서는 선비어를 사용하고 한인 관리의 지위가 낮았다
『北齊書』 권21 「高昂傳」 · 동위 고환의 군대
원문
> 於時鮮卑共輕中華朝士,唯憚服於昂。高祖每申令三軍,常鮮卑語。昂若在列,則為華言。
번역
“당시 선비인들은 모두 중화의 조정 관리들을 경시하였으나, 오직 고앙만은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고조가 삼군에 명령을 내릴 때에는 언제나 선비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고앙이 군대에 있으면 그를 위해 중국어로 말했다.”
고앙(高昂)은 한인 계통의 무장입니다.
이 기록은 고환이 선비족 문화를 습득한 데 그치지 않고, 실제 군사 지휘에서도 선비어를 사용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선비계 군인들이 한인 관리들을 낮추어 보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도 전합니다.
동시에 고앙의 예외적인 지위는 북방의 한인들이 모두 선비어로 전환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도 보여줍니다.
출처: [『北齊書』 권21 高昂傳 원문](pinguji.cn/bookContent/afd95…)
### 7\. 『북제서』 — 선비어를 구사하는 한인 관료가 중용되다
『北齊書』 권24 「孫搴傳」 및 권39 「祖珽傳」
### 손건(孫搴)의 사례
원문
> 又能通鮮卑語,兼宣傳號令。當煩劇之任,大見賞重。
번역
“그는 또한 선비어에도 능통하여 명령을 전달하고 선포하는 일도 맡았다. 번잡하고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여 크게 인정받고 중용되었다.”
출처: [『北齊書』 孫搴傳](zh.wikisource.org/zh-hans/北齊書/卷24)
### 조정(祖珽)의 사례
원문
> 元康因薦珽才學,並解鮮卑語。
번역
“진원강이 조정의 학문적 재능을 추천하면서, 그가 선비어에도 능통하다고 말하였다.”
출처: [『北齊書』 祖珽傳](zh.wikisource.org/zh-hans/北齊書/卷39)
손건과 조정은 모두 한인 계통의 문관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사례는 북제의 지배층을 섬기는 데 선비어 능력이 정치적 자산으로 기능했다는 것을 뒷받침합니다.
### 8\. 『몽계필담』 — 중국의 의관은 북제 이후 호복을 사용하게 되었다
『夢溪筆談』 권1 「故事一」 · 북송 심괄(沈括), 11세기
원문
> 中國衣冠,自北齊以來,乃全用胡服。窄袖、緋綠短衣、長靿靴、有鞢𩎃帶,皆胡服也。窄袖利於馳射,短衣、長靿皆便於涉草。
번역
“중국의 의관은 북제 이후로 모두 호복을 사용하게 되었다.
좁은 소매, 붉거나 녹색인 짧은 상의, 목이 긴 장화, 첩섭대 등의 허리띠는 모두 호복이다.
좁은 소매는 말을 달리며 활을 쏘기에 유리하고, 짧은 상의와 목이 긴 장화는 풀밭을 지나기에 편리하다.”
이는 중국 복식사를 논할 때 상당히 중요한 기록입니다.
송나라의 학자 심괄은 북제 이후 중원에서 사용된 복식 가운데 여러 핵심 요소를 북방 민족의 호복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다만 '모두 호복'이라는 표현은 북송 지식인의 포괄적인 역사평가입니다. 실제로 당시 모든 중국인이 모든 상황에서 호복만 입었다는 뜻으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몽계필담』의 판본 중에는 이 부분을 「乃全非古制」라고 적은 이문도 있습니다.
출처: [『夢溪筆談』 권1 원문](zh.wikisource.org/zh-hans/夢溪筆談/卷01)
### 9\. 『주자어류』 — 중국의 복식은 오호 시대부터 바뀌었고 수·당까지 이어졌다
『朱子語類』 권91 「禮八」 · 남송 주희(朱熹)의 언급
원문
> 今世之服,大抵皆胡服,如上領衫靴鞋之類,先王冠服掃地盡矣!中國衣冠之亂,自晉五胡,後來遂相承襲。唐接隋,隋接周,周接元魏,大抵皆胡服。
번역
“오늘날의 복식은 대체로 모두 호복이다. 상령삼과 장화 및 신발 같은 것들이 그러하니, 옛 성왕들의 관복 제도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중국 의관의 변화는 진나라 오호 시대부터 시작되었고, 후세에 계속 계승되었다. 당나라는 수나라를, 수나라는 북주를, 북주는 원위를 계승하였으니 대체로 모두 호복이었다.”
주희는 복식의 변화가 단기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위진남북조에서 수·당으로 이어지는 장기간의 역사적 과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기록 역시 당대 복식을 직접 관찰한 자료가 아니라 송대 유학자의 회고적·규범적 평가라는 점은 구별해야 합니다.
출처: [『朱子語類』 권91 원문](ctext.org/zhuzi-yulei/91)
### 북중국의 선비족 지배와 선비화 과정
| 시기 | 역사적 변화 |
| --------- | -------------------------------------------- |
| 337년 | 모용선비가 전연(前燕)을 건국 |
| 352년 | 전연이 염위를 멸망시키고 하북을 장악 |
| 357년 | 전연이 업(鄴)으로 천도 |
| 384년 | 모용수의 후연(後燕)이 성립 |
| 386년 | 탁발선비가 북위(北魏)를 건국 |
| 439년 | 북위가 중국 북방을 통일 |
| 494~495년 | 북위 효문제가 복식 개혁과 조정의 북방어 사용 금지를 추진 |
| 534~550년대 | 동위·북제에서 선비어와 북방계 군사문화가 강한 영향력을 행사 |
| 554년 | 서위가 장군과 휘하 병사에게 북방계 성씨를 부여 |
| 577년 이후 |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통일, 이후 수·당으로 제도와 복식문화가 계승 |
전연이 하북을 장악한 역사와 여러 선비족 왕조의 연속성은 허베이성 민족사무위원회의 역사 해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학술적으로 정리하면
이 기록들을 종합하면 북방 한인의 선비화는 다음 네 측면에서 확인됩니다.
* 생활풍속의 선비화: 『북제서』가 고환 집안을 두고 「遂同鮮卑」라고 직접 기록했습니다.
* 언어의 선비화: 『안씨가훈』과 『북제서』에서 한인 사대부와 관리들이 선비어를 학습하거나 활용했습니다.
* 복식의 북방화: 『구당서』는 북조의 일상복에 융이의 복식이 섞였다고 기록했으며, 『몽계필담』은 북제 이후의 의관에 호복의 영향이 컸다고 평가했습니다.
* 성씨·군사조직의 선비화: 『주서』는 서위에서 장군과 병사들의 성씨를 선비계 부족의 계보에 맞춰 개편한 정책을 기록했습니다.
다만 북위 효문제의 한화정책이 보여주듯, 이 시대의 문화변동은 한인이 선비화되는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라 선비족의 한화도 동시에 진행된 상호 교류 과정이었습니다. 또한 북조의 호복에는 선비족 외 다른 북방 민족의 영향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복식사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세 구절
『구당서』
> 北朝則雜以戎夷之制。
“북조에서는 융이의 복식 제도가 혼합되었다.”
『몽계필담』
> 中國衣冠,自北齊以來,乃全用胡服。
“중국의 의관은 북제 이후 호복을 사용하게 되었다.”
『북제서』
> 神武既累世北邊,故習其俗,遂同鮮卑。
“고환은 여러 세대 북방에서 살아 그 풍속을 익혔으며 마침내 선비와 같아졌다.”
결론적으로, 북중국 한인의 선비화와 북조 복식의 호복화는 중국 정사와 송대 문헌 양쪽에서 확인되는 역사적 현상입니다. 따라서 북조에서 나타난 특정 복식이 곧바로 선진시대부터 연속된 한족 고유복식이라고 주장하려면, 북방계 문화의 유입과 융합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먼저 검토해야 합니다.
특히 『위서』의 \*\*「婦女之服,仍為夾領小袖」\*\*는 협령·좁은 소매의 여성복이 북위의 옛 풍속을 개혁하려는 정책과 충돌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현재 조사 중인 교령·협령·북방 호복의 역사적 관계를 논증할 때 매우 중요한 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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